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화 이글스/역사 (문단 편집) === 1993 시즌 ~ 1998 시즌 === 그러나 [[1993년]]부터 타선 주축이었던 [[이강돈]], [[이정훈(1963)|이정훈]], [[장종훈]] 등의 선수들이 슬럼프와 부상으로 무너져버리기 시작하며 타선이 난국을 겪었다. 이 시기의 한화는 [[정민철]], [[구대성]] 등의 초일류급 투수들과 [[강석천]], [[이민호(1969)|이민호]] 등의 타자들로 겨우내 순위를 유지하는 형국이었다.[* 그나마 저런 초일류급 투수들조차 없었더라면 이때가 1차 암흑기가 될 뻔했다. 당시 타선이 영 힘을 못 썼던지라... 특히 주전 유격수 [[허준(1970)|허준]]은 언급하기 싫을 정도로 못 쳤다... ] 이 시기의 신인지명은 실로 실패 그 자체인데 잘 된 게 1996년 신인 드래프트밖에 없다... 또한 1998년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서 뽑은 둘([[마이크 부시|부시]], [[조엘 치멜리스|치멜리스]])은 부진하면서 제값을 못했다. --특히 부시... [[숀 헤어]]처럼 입 털땐 언제고...-- 이 시기에는 신인드래프트의 연이은 실패로[* 1996년 드래프트 성공도 야수쪽에 몰빵되어 있었다. 이상열은 현대로 트레이드되고 나서야 터졌다.] 계속 특정 투수진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1999년 [[댄 로마이어|외인]] [[제이 데이비스|타자]] 둘의 대박으로 기적적으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재건에 성공하면서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팀의 이미지가 변하게 되는데, 1998년까지가 리그 정상급의 투수진에 의존하는 경기를 했다면 1999년부터는 강력한 타선을 앞세운 공격야구로 변화하게 된다. 1993시즌 시작 전 빙그레에는 몇 가지 악재가 겹쳤다. 동계훈련 도중 이정훈이 발목 부상, 장종훈이 무릎 부상을 당했고 마운드의 핵심으로 부상한 [[정민철]]은 방위병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노쇠화로 경기력이 하락한 [[한희민]]은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장종훈은 잔부상에 시달리면서도 17홈런과 0.295로 나름 제몫을 했지만 이강돈은 0.233의 타율로 노쇠하고, 이정훈은 단 41경기 출장에 그쳤고 [[강석천]]은 시즌 도중 부상을 당했다. [[유승안]]의 은퇴 공백을 잘 메워준 김상국과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마무리를 잘 담당했던 [[강정길]] 역시 부진했다.[* 이들을 대신한건 10홈런 39타점을 기록한 [[진상봉]], 2할 7푼대 타율의 지화선이었다.] 결국 [[한용덕]]이 10승, 정민철이 '''방위병임에도 13승''', [[진정필]]이 전천후 투수로 나와 9승으로 분전했지만[* 그 외엔 [[이상군]]이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2점대 방어율 7승을 기록했지만 전 시즌까지 선발진의 한 축이었던 [[장정순]]은 5승으로 부진했다.] 결국 1993 시즌 61승4무61패의 성적으로 5위에 그쳐 6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로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가 끝났다.[* 유독 93년은 비와 관련된 불운이 심했다. 태평양과의 개막전에서 장종훈의 홈런으로 앞서나간 것을 우천취소당하며 불운이 시작됐고 이후 LG와 OB전에서 앞서던 경기를 우취당하고 다음날 더블헤더가 열리면 지는 경우도 있었다. OB와의 잠실원정은 우취로 지레짐작하고 대전에 머물다 경기 개시 소식에 부랴부랴 경기 시작 30분 전 겨우 도착해 0대1 영봉패를 당하기도. 6월 2일에는 대전구장에 비바람이 몰아쳐 조명탑이 기우는 바람에 두 달 동안 청주에서만 홈경기를 했는데 이 때문에 방위병이었던 [[정민철]]이 청주 홈경기에 출전할 수가 없었다. 휴가를 얻어야만 갈 수 있는 '가깝고도 먼 홈구장'이 되었다.] 신인들의 활약도 미미했는데 [[구대성]]은 아마추어 시절 혹사 여파로 시즌 내내 개점휴업했고, 공주고 시절 노히트노런으로 청룡기 우승을 이끌었던 [[노장진]]은 3승 4점대 방어율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시즌 후 선수단 무단이탈로 1994년 초 임의탈퇴됐다가 1997년에 복귀했다.] 6월 초까진 겨우겨우 4위권을 유지했으나 6월 들어 10연패로 급추락하면서 가을야구권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8월 중순 승패마진 -15까지 추락하며 쌍방울, 태평양과 꼴찌 경쟁까지 갔으나 이후 귀신같은 연승행진으로 61승4무61패로 5할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1993 시즌 최초의 감독 700승 달성을 끝으로 [[김영덕]] 감독은 감독직에서 은퇴했고[* 이후 1996-98년 LG에서 인스트럭터와 2군 감독을 지내기는 했지만 [[김승연]] 한화 회장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1군 감독은 맡지 않았다.], 1988~1990년 빙그레의 수석코치였다가 김영덕과의 불화로 롯데 감독으로 떠났던 [[강병철]]이 롯데와의 재계약을 거부한 뒤 이글스의 새 감독이 됐다. 한국화약 회장 [[김승연]]과 동생 [[김호연(기업인)|김호연]] 간 재산 분할로 빙그레가 계열 분리되어 김승연의 자사 계열사의 이름인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을 변경했다. 그룹명도 한국화약에서 한화그룹으로 변경됐고, 구단 로고도 바뀌었다. 한화의 이름으로 참가한 첫해인 1994년에는 초반 부진을 딛고 상위권으로 도약해 8월 한때 2위였다가 65승2무59패로 해태와 공동 3위로 마감하며 2년만에 포스트시즌에 복귀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선동열]]을 무너뜨리고 [[구대성]]의 1승 1세이브로 활약하며 2전 전승으로 포스트시즌에서 처음으로 해태를 이겼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강력한 투수진에 [[김경기]]가 3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린 [[태평양 돌핀스]]에 맥없이 물러났다.[* [[정민철]]은 1차전 패전투수에 이어 3차전 구원등판하여 [[김경기]]에게 연장 10회 끝내기 홈런으로 또 패전투수가 됐다.] 원투펀치였던 [[한용덕]]이 시즌 막판 교통사고를 당해 포스트시즌에 나오지 못했던 점이 아쉬운 점이었다. 이 해 신인 [[박지상]]이 3할을 치며 이정훈의 공백을 메우고[* 고졸선수 최다인 18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고, 이상훈의 노히트노런도 저지했다. 다만 이해 반짝이었고, 다음 해 2할 5푼, 1996년 1할 1푼을 기록하여 코칭스태프와의 불화 끝에 방출되었다.] 2년차 신인 [[이민호(1969)|이민호]]가 63경기에만 나서고도 팀 내 최다인 14홈런을 치며 강석천의 부상 공백을 메우고[* 그러나 이후 방위 복무 및 버거씨병 발병으로 더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쌍방울로 이적했다.] 세대교체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장종훈의 홈런이 17개에서 10홈런으로 줄었고, 이정훈의 악바리 근성은 자신을 부상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팀 타선은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가 [[김상국]]과 [[강정길]] 둘 뿐이었고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는 팀 컬러와는 정반대로 물방망이였다. 하지만 30승[* 한용덕은 16승, 정민철은 14승을 올렸다.]을 합작한 [[정민철]]과 [[한용덕]]의 원투펀치, 선발과 구원을 오간 더블스토퍼 [[송진우(야구)|송진우]](9승10세이브)와 [[구대성]](7승12세이브), 삼성에서 트레이드된 유망주 [[이상목]]과 원년 에이스 [[이상군]] 등이 골고루 활약해주며 버틸 수 있었다. 마이너스 득실에 팀 득점력도 최하위권이었지만 마운드의 힘으로 가을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 [[정민철]]은 리그 최다 이닝인 218이닝에 2.15의 방어율과 196개의 탈삼진으로 이 부문 1위에 올랐지만 투수 골든글러브는 이해 프로야구 최초 40세이브를 기록한 태평양의 [[정명원]]에게 돌아갔다.] 1994 시즌 이후 한화 팬들을 분노하게 만든 삼성과의 2대2 전격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부상으로 노쇠화가 왔다고 판단된 프랜차이즈 스타 [[이정훈(1963)|이정훈]]과 [[장정순]]을 내주고 [[정경훈(야구선수)|정경훈]]과 [[정영규]]를 데려왔다. 이 트레이드는 빙그레 때부터 동고동락했던 선수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정경훈이 미스터 올스타를 수상하는 등 활약을 하긴 했으나, 이 둘은 완전한 주전이 되진 못했고 우승 즈음하여 정리된다.] 1995 시즌 [[장종훈]]이 지난 두 시즌 간 부상으로 인한 부침을 극복하고 타율 0.326과 22개의 홈런으로 막판까지 타율왕과 홈런왕 경쟁을 펼칠 정도로 부활에 성공했다.[* 아쉽게도 출루율 1위, 장타율 1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삼성에서 건너온 정영규는 2할대 후반과 11홈런, 주전 2루수 [[김용선(야구)|김용선]][* 2021년 현재 충청팜의 한 축인 [[세광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있다.]은 10홈런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나머지 타자들의 성적은 뛰어나지 않아 팀 전반적인 공격력의 향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해부터 주전 포수는 김상국에서 신인 [[강인권]]과 [[전형도]] 대신 OB에서 트레이드된 [[조경택]]으로 넘어갔다. [* 김상국은 이 해를 마치고 [[박은진]]을 받는 대신 현대로 트레이드되었다.] 투수에서는 [[정민철]]과 [[송진우(야구)|송진우]]가 동반 13승에 각각 3.21과 3.20의 방어율로 활약하고, [[구대성]]도 4승 18세이브 ~~14패~~[* 이해 12번이나 선발등판했다. 선발로 뛸 사람이 없으면 구대성이 선발등판했기 때문에 다패왕이 되고 말았다. 선발이 5~6이닝 먹으면 6~7회 쯤 구대성이 나오고, 4~5선발 자리에 또 구대성이 선발등판하는 방식으로 심하게 혹사당했다.] 방어율 3.54, 161탈삼진으로 활약하고 지난해 말 교통사고를 겪었던 [[한용덕]]도 비록 승운은 8승13패로 불운했지만 180.1이닝 소화에 3.29의 방어율로 건재함을 증명했으며, 유망주로 가능성을 보였던 [[이상목]] 역시 전천후로 134.1이닝을 소화하며 7승5세이브 3.75의 방어율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독수리 5형제 이외에 활약한 투수는 전무한 수준이었다. [[이상군]]은 혹사와 노쇠화 여파로 4점대 후반의 방어율로 부진했으며 무엇보다 신인 투수 [[신재웅(1972)|신재웅]]이 부상으로 인해 11경기 등판 5점대 방어율로 부진했다. 결국 투타 부조화로 인해 한화는 전반기 롯데와 3, 4위 경쟁을 하며 4위로 마치고도 후반기 급격하게 추락하여 55승 71패, 승률 0.437로 6위에 그쳤다. 1987년 이후 8년만의 4할대 승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6년]] [[1996 KBO 신인드래프트|신인 드래프트]]로 신인 4인방([[홍원기]], '''[[송지만]]''', [[이영우]], [[임수민(야구선수)|임수민]]) 외 기타 알짜 신인[* 고졸우선지명으로는 [[이상열(야구)|이상열]], [[심광호]] 등이 있다.]들을 발굴해내며 타선도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1996년 신인 4인방이 활약하고 [[구대성]]을 굴려서[* 18승 3패 24세이브 1.88의 평균자책점으로 4관왕(평균자책점&다승&구원왕&승률), MVP,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다.] 정규시즌 3위(70승1무55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해태와 마찬가지로 시즌 초반 최하위권에서 부진하다가 5월 이후 치고 올라갔다. 꾸준히 3위권에 머물다가 시즌 막바지 해태를 1.5경기차까지 추격하지만 막판에 주춤한 사이 쌍방울의 연승으로 인해 3위로 마감했다. 쌍방울에 11승7패로 우위, 현대에 9승9패로 동률이었으나 해태에 상대전적에서 5승13패로 크게 뒤쳐진 것이 아쉬웠다.] 정규시즌에서 9승9패로 팽팽하게 맞섰던 [[현대 유니콘스]]에 1차전 0-15 대패를 당하는 등 2전 2패로 광탈했다.[* 구대성이 혹사 여파로 당초 1차전 선발 예상된 상태에서 갑자기 [[정민철]]이 선발등판했고, 결국 5회를 기점으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2차전에서 구대성이 4이닝 투구했지만 폭투로 점수를 내주며 패전투수가 됐다. 1차전에서는 성난 대전아재들이 경기장 안으로 오물을 투척하여 현대 외야수들이 헬멧을 쓰고 수비를 하기도 했다.] 이 해 [[송지만]]은 입단하자마자 0.287의 고타율에 18홈런을 쳐주고 [[이영우]]와 [[홍원기]], [[임수민(야구선수)|임수민]]도 데뷔 첫 해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다. [[장종훈]]이 2할대 중반의 타율로 주춤했지만 15개의 홈런으로 일발장타 능력은 아직 남아있었고, 부상 및 부진으로 허송세월했던 [[강석천]]이 2할대 후반의 타율로 재기에 성공했다. 마운드에서는 구대성 이외에도 [[송진우(야구)|송진우]]과 [[정민철]]은 나란히 200이닝 이상 소화에 15승과 13승[* 정민철은 12패로 불운했다.]을 거두며 원투펀치 역할을 해줬고 [[이상목]]은 9승13패로 다패왕이 됐지만 3.97의 방어율로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한용덕]]은 이전 시즌보다는 부진했지만 4점대 중반의 방어율과 8승으로 버텼다. 이상군이 8점대 방어율로 망하며 쓸쓸히 은퇴했지만 한화는 지난해보다 향상된 투타 전력으로 2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복귀했다. 새로운 신예들의 발굴과 함께 3년 동안 2번의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던 [[강병철]]은 재계약에 성공했고, 1997 시즌에는 우승후보 중 하나로 꼽히게 됐다. 그러나 홀수해에는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하는 징크스를 이어가며 1997시즌 시즌 초반부터 최하위권으로 내려간 끝에 51승2무73패로 7위에 그쳤다. 최하위였던 롯데에도 6승12패를 기록했지만 6위 현대를 11승2무5패로 호구잡았기 때문에 7위라도 할 수 있었다. 방어율 4위에 팀타율은 6위였지만 순위는 7위로 1점차 패배가 잦았다. 지난해 15승을 거뒀던 송진우가 6승 투수로 추락해버리며 14승을 올린 [[정민철]] 혼자서 팀을 이끌었다.[* 5월 23일 OB전에서 무사사구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달성한다. 유일한 1출루가 스트라이크 낫아웃 출루였다. 방어율 2위, 탈삼진 1위로 맹활약했지만 MVP는 커녕 투수 골든글러브조차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과 다승만 앞설 뿐 정민철보다 모든 기록이 떨어지는 [[이대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외엔 [[구대성]]이 8승 25세이브에 3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 강병철-이희수 시기를 통틀어 유일하게 선발등판이 없던 시즌이다.] 신재웅은 이 해 3점대 방어율과 규정이닝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타선에서는 [[강석천]]이 0.322의 고타율과 17도루, [[장종훈]]이 2할 후반대의 타율과 22홈런으로 활약했고, 몇 년 간 한화 유격수로 활약하는 [[백재호]]가 16홈런을 기록했고, 삼성에서 방출되어 한화로 온 [[전상렬]]도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지난해 가능성을 보여준 신인들이 대거 [[소포모어 징크스]]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 중 [[송지만]]과 [[홍원기]] 정도만 어느정도 성적을 유지했고, 이영우와 임수민은 크게 부진했다.] 이강돈은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신인드래프트에서는 주전 유격수가 된 백재호와 중간계투에서 활약한 [[김해님]] 정도만 건졌다. 1차지명인 이성갑은 1군에서 공을 던지지도 못하고 은퇴했다.[* 여담으로 이때 향후 배우로 전향한 [[김기무|김대원]]이 지명되기도 했다.] 1998 시즌에는 짝수해 포스트시즌 공식 그런거 없이 55승5무66패로 시즌 7위로 마감했다. 개막 직전만 해도 정민철, 구대성의 활약과 타자용병들의 가세로 인해 OB, 현대 등과 함께 우승후보로 거론될 정도였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시즌 초반에는 선두를 질주하다가 순위가 내려가면서 올스타 브레이크 도중 [[강병철]] 감독은 성적부진으로 경질되었고[* 강병철 경질 시점 한화의 성적은 29승2무33패에 4위 쌍방울과 0.5경기차임에도 경질되었다.] [[이희수(야구)|이희수]]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이 해 [[한용덕]]이 중간계투에서 맹활약하며 7승 4세이브 2점대 방어율로 부활하고 뒷문은 [[구대성]]이 8승24세이브로 꾸준한 모습을 보였지만 [[정민철]]은 그동안의 누적된 이닝으로 인한 부상 여파로 간신히 10승을 채우는 데 그쳤고, 송진우는 전년도와 똑같은 6승으로 마무리했다. 이 해 팀내 최다 이닝과 [[노장진]][* 1997년에 한화로 복귀하여 1997 시즌 6승, 1998시즌 7승을 기록한 뒤 [[최익성]]을 상대로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과 함께 최다선발등판을 기록했던 이상목은 9승17패로 다패왕을 기록했다. 외국인 용병제가 시작된 1998년 한화는 타자용병 마이크 부시와 조엘 치멜리스를 뽑았는데 부시는 MLB 경력에 마이너리그에서 100홈런 이상 때려낼 정도로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 변화구에 약점이 잡히고 부상으로 드러누우며 2할대 초반의 타율과 10홈런에 그친 채 퇴출되었다. MLB 경력이 없고 마이너만 전전한 뒤 대만야구에서 한 시즌 활약했던 치멜리스는 17홈런 63타점으로 타선에서 활약했지만 수비 불안으로 재계약에 실패했다. 외국인 타자를 제외한 국내 타자는 16홈런-25도루를 기록한 [[송지만]]과 13홈런을 기록한 유격수 [[백재호]] 외에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장종훈]]은 17홈런을 기록했지만 한창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활약이었다. 이 해 현대의 독주로 유례없는 순위싸움이 벌어져 시즌 막판까지 포스트시즌 경쟁을 펼쳤지만 마지막 14경기에서 경쟁팀 해태와 OB와의 연이은 맞대결에서 밀리는 바람에 2승1무11패에 그치며 4위에서 7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반면 9월 9일까지 꼴찌였던 OB는 막판 21경기에서 마지막 8연승 포함 16승1무4패로 막판스퍼트를 내며 극적으로 4위를 차지했다.] 시즌 118경기를 치른 시점까지 한화는 4위였으나 이후 1무 포함 7연패하면서 쌍방울에도 뒤진 7위로 마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